앙리미쇼를 읽다
(102) 문자가 생겨나려고 하는 인류문명 초창기의 인간의 머리 속 무늬 같은 그림을 애써 그리다가 앙리 미쇼가 죽었다. 화가로서 대성하지도 못하고, 시인으로서 릴케처럼 어스름 달밤에 남몰래 읽히지도 않는 시인으로서 남아 있을 뿐이다.
(103) 그래도 남들과는 조금은 다르고자 죽을 때까지 노력한 그가 좋다. 별로 이루지 못했어도 인생을 대하는 자세만은 늘 남다르고자 노력했던 그가 좋다.
자신은 전부다-프리다칼로
(104)
물질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중력이다. 지구 가운데로 잡아당기는 힘이다. 그로 인해서 지구 껍데기에 조개껍질처럼 달라붙어 있는 고층 건물들이 견뎌내는 것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힘은 자기애다. 자신을 사랑하는 본능적인 힘이다. 평생을 봉사로 보내는 사람마저도 자기애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런 자기애를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풀어낸 대표적인 사람이 프리다 칼로다. 기이하다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서 시원한 해방감을 느낀다. 언젠가 비밀스럽게 품은 적이 있었던 끔찍한 생각들이 이 여자의 그림을 통해서 다시 확인되면서, 동시에 거기서 놓여나는 것이다. 무의식을 지배하던 숨겨진, 억눌린 슬픔들이 그의 그림을 통해서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풀어지는 것이다. 세상은 어디나 똑같다.
(105)
어느 문화권이든 어느 계층이든,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솔직한 것 그것이 전부다. 요사떨지 않고 솔직한 것, 자신을 직시하면서, 그림으로 그려서 표현한 것, 그리면서 자신을 위로하고 스스로 치유하면서 인생을 살아낸 것이다. 이것이 세월을 뛰어넘고 공간을 건너뛰어 우리를 살아 있는 프리다 칼로에게로 데려가는 힘이다. 공감케 하는 힘이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고 그래서 다리를 절고, 커서 교통사고 당해서 서른다섯 번이나 수술을 해대면서 고통 속에서 살아간 여자. 그러면서도 죽는 날까지 장엄하고 화려하고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은 여자. 여왕처럼 고고한 자세로 쌍욕을 거침없이 뱉어내던 여자. 언제나 행복하고 화려하고 쾌활한 겉모습을 유지하면서 강인한 풍모를 보여주던 여자. 구질구질한 슬픔을 결코 드러내거나 인정하지 않던 여자. 어디서든 신화적인 환상을 창조해내던 여자. 이런 자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다. 우리의 이상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되고 싶은 형상을 거기서 읽는 것이다. 환상이되 환상만이 아닌, 극심한 고통, 누구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고통, 공인된 고통을 평생을 걸쳐 누리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그러지지 않는 독한 자기애. 포기하지 않는 질긴 성취욕......슬프면 슬픈 색깔로 장엄하고, 아프면 아픔 자체로 화려한 환상을 만들어간 여자. 현실을 핑계대면서 비굴해지려는 인간들에게 독침을 찌르는 여자. 그 무엇이 우리를 장엄치 못하게 하는가? 저주 같은 불행을 받으면서도 자기 길을 화려하게 간 이 사람을 보라!
프리다 칼로
(108)
...그 친구의 자살 권유 이후에 나는 인생의 진로를 확 바꾸어서 그림 그리는 일로 몰두했다. 그 전까지는 막연하게 주어지는 대로 살았다. 그 이후에 내가 선택하면서 살았다. 모든 걸 나 자신이 결정하고 실행했다. 죽음이라는 것을.
그 후 나는 이미 죽은 나를 본 것처럼 생각했다. 나는 죽었다. 오로지 그림을 그려보려는 욕망 하나 때문에 생명을 연장한 것이다.